반곡역의 명성(?)은 오래 전에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열차가 더 이상 서지 않게 된 역의 대합실을 갤러리로 만들어서,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이야기였다. 이 유명한 역, 한번 가 봐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갈 방법이 마땅찮아서 여태껏 미뤄두고 있었다.
열차가 정차하지 않으므로 열차로 갈 수 없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원주에서 이 반곡역까지 시내버스가 하루 7회 다니지만(
버스 시간표 링크), 문제는 버스의 간격. 한번 가면 적어도 두어 시간은 역 주변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주변에 적당히 접근할 수 있는 대중교통수단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어 보인다. 역시 방법은 KTX(Koll TaXi)밖에 없는 것인가...이번에는 큰맘 먹고 차로 접근해 보았다.
반곡역 주변의 지도를 혹시나 찾아본다면 아시겠지만, 혁신도시 건설부지를 가로질러서 가야 한다. 내비를 찍긴 했는데 과연 이 내비가 맞긴 한 건지 계속 의심하게 된다. 공사장 한복판을 지나지 않나, 진입로 일부는 비포장이 되어 있고, 역 표지판은 있는데 역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역에 거의 다 와서야 역사를 보고 안도하게 된다.
주변의 혁신도시 건설지와는 딴 세상 같은 작은 역사는 왠지 모르게
구둔역을 닮아 있다. 역시 설계사무소 사람들하고 마주앉아서 '이역은 A타입, 저역은 B타입' 하고 결정한게 틀림 없어...orz
봄에는 저 벚나무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연출한다고 한다. 가을에는 낙엽이 지고...
분명히 내부를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둘러보느라 정작 대합실 내부 사진 찍는 걸 깜빡한 듯 하다. 안에는 주로 이 주변의 철도 풍경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있었다. 갤러리 내부나 설치 미술품의 테마는 주로 주위에 있는 또아리굴(루프)과 당시로는 까마득한 높이의 교량이었을 백척교, 그리고 그 공사에 강제 동원된 식민지 조선인들의 아픔이었다.
그런데 또 천장은 잘 찍었다 ㅎㅎ 흐린 날이었지만 채광이 잘 되어 별도의 조명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이렇게 외관을 찍은 사진 한켠에 살짝 나온 것으로 내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려나. 도장을 새로 하고 그림을 위한 조명을 설치하는 정도 외에는 내부를 거의 바꾸지 않은 듯 보인다.
일제는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험한 산지를 지나는 중앙선을 부설했는데, 이 험한 치악산을 지나는 철로를 놓는 것은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강제로 차출된 이들은 열악한 근로 환경과 과로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부상당하거나 심지어는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사진의 '철도노역 군상'을 보니 그 고됨과 아픔이 전해져 오는 듯 하다.
문득 큐슈 히사츠선의 한 터널에 새겨져 있다는 있다는 '천험약이(天險若夷 : 천하의 험한 곳을 평지와 같이 하다)'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이 글귀를 새긴 사람이 조선총독부 초대 정무총감을 지냈던 이(야마가타 이사부로山県伊三郎)라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과연 이 '천험약이'를 실현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여러 모로 착잡함을 느끼게 되는 상이었다.
그 옆에 있는 것은 또아리굴을 형상화한 조각이었다. 일견 재치가 돋보이는 조각이지만, 옆의 철도노역 군상과 같이 있으니 그보다는 땀과 눈물, 그리고 한이 섞여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역사 옆으로는 침목을 활용하였는지, 기찻길같은 작은 산책로가 나 있다. 오른쪽에 있는 작품의 제목은 '위령탑'. 역 바깥에 있는 작품들은 모두가 쉬이 지나치지 못할 것들이다.
산책길 끝 울타리에는 이렇게 작은 사진전도 열리고 있다. 사진들은 주로 이 근방의 철도공사 및 개통 즈음을 다루고 있고, 또아리굴의 평면도도 나와 있다.
때마침 역장님이 교대근무를 마치고 퇴근 즈음이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도 얻어마실 수 있었다. 새벽에 먼 길 달려와서 슬슬 노곤노곤해질 시간에 마시는 커피라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지나가는 열차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주셨다. 나는 이 역에 오기 전에 갤러리는 과연 언제 오픈하는 건지 궁금했는데, 상시 오픈이라고 하신다.
때마침 들어오는 하행선 열차. 역장님은 퇴근하면서 사진 많이 찍으라고 말씀은 하셨는데...한대는 커피 마시느라 그대로 보냈고, 한대는(무려 새마을호!) 내가 역을 떠나려고 하니 통과하기 시작한다^^;; 뭐 사진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역 앞에 놓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며 열차 지나가는 걸 보고 있자면, 학교에서 강의하던 중이라도 근처 역에서 증기기관차 기적소리가 울리자 자리를 박차고 역으로 뛰어나갔다는 드보르작도 부럽지 않다 ㅎㅎ
이 역도 역시 구둔역같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여러 차례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는데, 보통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된 역들은 연기자들의 사인이나 간단한 소품 같은 증거품(?)을 전시해 놓지만 이 역은 그림 전시 때문에 그런 것들을 전시할 공간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못 보고 지나친 것인지. 어떤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이곳은 또한 한국전쟁때의 격전지였다고.
이 역도 닮은꼴의 구둔역과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향후 서원주-제천간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 이 역도 그저 '예전에 역이었던 문화재'가 될 것이다. 복선 전철화 완료는 2018년을 예상하고 있어 구둔역처럼 내일 모레 없어질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걱정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역은 한번 갤러리로의 환골탈태를 거쳤으니, 이 갤러리가 유지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하고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잠깐 사족 좀 달자면, 이 내용을 알아보면서 미래철도DB에 접속해 봤는데, 남원주역부터 봉양까지 터널을 죽 뚫을 계획이란다. 그렇다면 그 중간의 역들은 자동적으로 폐역이 되고, 또아리굴도 없어질 것.
이 사진으로 반곡역 주변의 환경을 알 수 있으려나. 혁신도시가 완공되면 이 역도 다시 손님들로 북적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봤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즈음에는 이 역은 더 이상 역의 기능을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잊혀지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문화 공간으로 새 도약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덧 : 역장님께서 말씀하시길, 26일 저녁 9시 30분 EBS에서 ('한국기행'인 듯)에서 원주를 다루면서, 반곡역도 나온다고 한다. 제대로 기억하는 게 맞다면 간현역 등도 나온다고 하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챙겨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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